[교수신문] “조선의 근대 과학기술은 특수한 상황 반영된 재구성의 산물”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소장 신동원)가 10년간의 장기 프로젝트로 추진하고 있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가 지난해 1, 2, 3권에 이어 최근 4, 5, 6권이 동시 출간됐다. 총서4권 『세종시대의 과학기술』(구만옥 경희대), 총서5권 『조선후기 과학사상사: 서구 우주론과 조선 천지관의 만남』(문중양 서울대), 총서 6권 『한국 근대과학 형성사』(김현희 서울대 기초교학연구원)다. 지난해 출간된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 의학, 지리학, 교통사를 다뤘다면 이번 총서 4, 5, 6권은 각각 세종시대(15세기), 조선후기(17~18세기), 대한제국기(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 전까지)를 촘촘히 들여다봤다. ‘영·정조 시대 과학기술’을 다룬 책은 추후 출간될 예정이다.

구만옥 교수의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은 조선왕조의 과학기술정책 기조와 그 성과를 세종대를 중심으로 정리한 책이다. ‘만고의 성군’ 세종시대 과학기술 분야의 성과는 눈부시다. 그러나 최근 전통과학을 둘러싼 두 가지 비판적 문제제기가 있었다. 하나는 근대주의적 관점의 문제다. 근대과학의 관점에 따라 전통과학 분야를 분류하고 그 가운데서 근대과학의 요소만을 추출해 재배열할 경우, 전통과학이 출현하고 작동했던 사회적·지적 맥락이 사상돼버릴 위험성이 크고, 그 역사적 위상에 대한 평가도 자의적 해석이 돼 형평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한편 동아시아 세계질서 속에서 중심부 중국과 주변부 조선의 상호 관계가 주요 화두로 등장하게 되는 중화주의적 관점에 의거했을 때 생기는 문제는, 조선의 일체의 문화 사업은 거대한 중국문화의 수용·흡수의 과정으로만 이해돼, 한국 전통과학의 ‘독자성’ 역시 중화문명의 아류로 해석하는 편향성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구 교수는 이러한 비판적 문제제기에 주목하면서 유교·주자학의 정치사상적 필요에 따라 추진된 과학정책이라는 한 측면과 집권체제의 사회경제적 요청에 따라 시행된 각종 과학기술정책의 성과와 의미를 분석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세종대의 과학기술정책 기조와 그 성과를 정리했다.
‘서구 우주론과 조선 천지관의 만남’이란 부제를 단 문중양 교수의 『조선후기 과학사상사』는 제목 그대로 이질적인 서구 우주론과 대면한 조선후기 학인들이 어떤 사상을 펼쳤는지를 추적했다. 우리의 과학기술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다음과 같다. 세종대에 눈부신 성취를 이룩했던 우리 과학은 이후 계승·발전되지 못했고, 조선후기 서구의 ‘새로운 과학’의 유입에 조응하는 데 실패했으며, 개항기에 이르러 거의 백지상태와 같은 과학기술의 부재 속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받아 나라가 멸망에 이르렀다는 것. 이른바 근대과학주의적 역사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이 강고한 인식은 그간 많은 연구를 통해 근간부터 허물어졌으나 여전히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저자 문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 같은 인식은 사실이 아니다. 조선의 사대부 학인들은 17세기 이후 서구의 과학을 적극적으로 학습하면서도 성리학적 자연인식체계를 거부하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18세기 후반 서명응의 易學的 천문학과 최한기의 기륜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고전적 자연인식체계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자연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전통적 감각경험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지구설과 같은 문제를 대면하고 ‘그들의 방식’으로 만족스럽게 문제를 풀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과학을 구성해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조선후기의 과학사상 흐름을 조명하며 서구 과학과 조선 과학의 관계를 공여자와 수용자의 구도에서가 아니라, 두 과학의 만남과 그 결과를 어떠한 편견도 없이 공평하게 관찰하고자 했다.

이렇게 세종조와 조선후기를 거친 한국 근대과학은 이후 어떤 경로를 밟게 될까. 김연희 교수의 『한국 근대과학 형성사』의 관심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개항 전후부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과정을 살피고, 그에 따른 변화 양상을 점검하는 데 집중했다. 저자는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과정에서 일어난 변용과 굴절, 혼종의 양태를 살피면서, 근대 과학기술이 조선에서 서양과 똑같은 형태로 유지되고 존재하는 독립적 완전체가 아님을 밝힌다. 그가 던진 질문은 이렇다. 첫째, 근대 과학기술 도입 이전, 전통사회에서 해당하는 분야들이 존재했는가? 둘째, 도입 분야마다 경로가 다르고 결과도 같지 않으며 소요 기간에도 차이가 있었는데, 이런 차이는 왜 발생했으며 무엇이 이런 차이에 영향을 미쳤는가? 셋째, 구성요소와 배경이 다른 각각의 서양 과학기술이 조선이라는 공간에 도입됐을 때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가? 넷째, 도입된 서양 과학기술은 조선 사회, 나아가 조선 전통의 지적 체계와 어떤 상호작용을 이뤘는가? 마지막으로, 사업 추진 세력의 전환이 도입 과학기술의 성격과 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저자가 던진 질문들은 결국, 과학기술이 사회적·문화적 배경과 지적 전통에 의해 변화되는 체계이자 조선 사회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특징을 갖추고 재구성되는 산물이란 주장으로 수렴된다.

한편 7권 『한국 과학기술혁명의 구조』(김근배 전북대)가 이달 말~12월 초에 출간될 예정이다. 이어 『한국 현대 농업기술사』(김태호 전북대),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체제』(문만용 전북대), 『한국 과학기술정책사』(송위진·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한국 천문학사』(전용훈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이 그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낼 계획이다.

출처 :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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