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릉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과학 기술연구원(KIST)은 1966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는데, 이는 베트남전 에 한국이 전투병을 파견하기로 한 결정 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하지만 KIST 건물에 들어가는 ‘4인치 워터밸브’조차 수입을 해야 하는 한국 상황에서 전자현미경과 컴퓨터와 같은 고급장비가 설치 되는 연구소가 과연 필요하냐는 냉소적 지적이 미국 의회에서 나왔다. 이 같은 의심의 눈길 속에 세워진 KIST는 예상 외로 빠른 성장을 보이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연구소로 발돋움했다.
한국적 전통으로 압축성장 이룬 과학기술
KIST를 모델로 1970년대 연이어 설립 된 정부출연연구소는 한국의 과학활동을 이끌었으며, 뒤이어 민간기업의 연구개발이 본격화되고 대학의 연구가 활성화 되면서 한국의 과학기술은 짧은 기간에 ‘압축적 성장’을 기록했다. 연구개발비나 연구인력, 논문 편수, 국제 특허 등의 지표에서 한국은 세계 10위권에 진입했으며, 이같은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 지표는 뒤떨어져 있지만 한국 과학기술은 분 명 괄목할 만한 성취를 거두었다.
2012년 말 KIST와 베트남 과학기술부는 KIST를 모델로 하여 베트남에 V-KIST 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베트남전이 계기가 되어 설립된 KIST가 베트남에 자신을 닮은 연구소를 세운다는 소식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한국 과학기술이 지닌 위상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최근 베트남 외에도 많은 후발국가들이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상에 주목하고 있으며, 우리의 과학기술정책 경험을 배워가고자 각국의 담당자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 물론 한국 과학기술은 단순한 성공스토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압축적 성장 과정에서 빚어진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오히려 그 같은 빛과 그림자를 함께 담고 있는 생생하고 역동적인 역사이기에 한국 사례가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은 최근 우연히 이루어진 사건은 아니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한국은 세계적인 수준을 견지했던 동아시아 문명권의 일원으로 그 위치를 유지해왔다.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금속 활자,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뿐 아니라 고려청자, 거북선, 한글, 동의보감 등 한국은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에서 뚜렷한 한국적 전통을 형성해왔다.
올바른 한국과학문명 알리는 ‘한국과학문명사총서’ 간행
특히 이러한 전통이 중국이라는 거대 문명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그 흐름에 휩쓸려 매몰되지 않고 이루어낸 성취라는 점에서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우기를 비롯한 한국 과학문명의 여러 성과들이 국제적으로 중국의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거나 중국의 아류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동안 한국 과학문명에 대한 연구와 이를 묶어내 세계 학계에 알리려는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고 한국 과학문명의 올바른 역사와 현주소를 알리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KAIST 한국과학문명사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한국과학문명사총서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과학문명사총서는 2010년 12월부터 시작하여 10년에 걸쳐 진행되는 대형 연구과제로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이 관리하는 사업이다. 첨성대에 반영된 천문학에서부터 현대의 반도체와 정보통신 기술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과학기술 문명의 발자취를 정리하는 이 과제를 위해 연구책임자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신동원 교수의 지휘 아래 전근대 팀장 전용훈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근현대 팀장 김근배 교수(전북대학교)를 비롯하여 20여 명의 학자들이 모여 1단계 3년간 12주제를 연구했으며, 2013년 12월부터 새로운 연구진을 구성하여 2단계 3년의 연구를 시작했다.
당초 이 총서는 한국 과학문명 전반을 포괄하는 국문 30권, 영문 7권의 간행을 목표로 했으나 최근 국문 21권, 영문 11권으로 재조정되었다. 영문판은 국문판의 번역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기획・연구되며, 이를 위해 한국 전통지리학 연구자인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윤홍기 교수가 영문에디터로 초빙되어 국내 연구자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또한 영국 케임브리대 니덤연구소 소장 크리스토퍼 컬른(Christopher Cullen) 교수와 호주 퀸즐랜드대 모리스 로(Morris Low) 교수가 코에디터로 유치되어, 각각 전근대와 근현대 부분을 맡아 국제적 수준에 맞는 에디팅 작업을 담당하기로 했다.
이들 연구팀은 세계 학계에 한국 과학문명의 올바른 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지명도가 높은 출판사를 찾았으며, 가장 먼저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시리즈를 펴낸 케임브리지 대 출판사와 접촉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은 영국의 생화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이 1954년부터 간행하기 시작한 대작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학술 명저의 하나로 꼽힌 바 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동양의 과학문명이 서양보다 뒤떨어졌다는 오랜 편견이 부서졌으며, 중국의 전통과학, 더 나아가 동양의 문명에 대한 서구인들의 인식이 새롭게 변하게 되었다.

케임브리지대 출판사와 영문판 10권 간행 체결
한국과학문명사 연구팀은 총서 전체와 각 권에 대한 연구계획서를 케임브리지대 출판사에 제출했으며, 출판사의 담당 에디터와 몇 달에 걸쳐 의견을 나누며 총서 전체 구상을 조율했다. 처음 연구팀은 7권의 영문 판 기획안을 준비했으나, 시리즈 전체의 완결성을 위해 10권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아 3권에 대한 구상을 추가했으며, 시리즈의 제목도 오랜 논의 끝에 〈Science and Civilisation in Korea〉로 정했다. 이는 한국의 과학문명이 중국의 과학문명에 비견되는 위상을 인정받았다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중국의 과학과 문명〉 시리즈에 적용된 마케팅 기구를 이용할 수 있다는 실용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출판사로서도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과학문명사라는 확장된 범위의 컬렉션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이후 일본을 비롯해 다른 동아시아 과학문명사까지 포괄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에 그 같은 제목을 원했다.
연구팀이 작성한 연구계획서는 익명의 5명 심사위 원들의 심사를 거쳐 2013년 10월 1단계로 5권을 간행하기로 최종 결정이 났으며, 5권의 성과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로 추가 5권을 추진하기로 했다. 실제 이 책들이 서가에 꽂히기까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케임브리지대 출판사에서 한국학에 대한 총서가 간행된다는 것은 우리 학계에서 처음 있는 경사라 할 수 있다. 출판사에서 받아들인 10권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
- Technology, Everyday Life, and Korean Civilization
- History and Cultural Studies of Geomancy in Korea
- Patients, Doctors, and the State: History of Korean Medical and Pharmaceutical Culture
- History of Astronomy in Korea
- Mathematics and the History of Korean Civilization
- The West and Korea in the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
- Imperialism, Colonialism, Post-colonialism and Technoscience in Korea
- Development of Science and Technology under the Korean Authoritarian Regime
- Dynamics of Technological Development in Korean Industrialization.
현재 연구 집필중인 4권, 2018년 출판 예정
현재 일차적으로 4권에 대한 연구 및 집필이 진행 중이다. 우선 제1권으로 확정된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는 전근대에서 근현대를 망라하는 한국과학기술사 통사로 세계 각 대학의 한국과학문명사 교재로 활용될 것이며, 출판사에서 이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교재는 신동원 교수와 김근배 교수가 대표필자로 참여하며, 그동안 이루어진 한국 과학문명에 대한 연구를 새로운 시각으로 충분히 녹여내어 한국 과학문명의 흐름과 특성이 잘 드러나게 기술될 것이다.
두 번째 〈History of Astronomy in Korea〉는 전통 과학의 핵심이었던 천문학의 역사를 통해 한국인의 하늘에 대한 지식과 태도, 한국천문학의 동아시아적 보편성과 한국적 독자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연구로서, 전용훈 교수가 대표필자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세 번째는 〈History and Cultural Studies of Geomancy in Korea〉로, 한국의 환경과 전통 문화의 맥락 속에서 형성된 한국의 독자적 풍수 전통을 규명하는 저작이다. 윤홍기 교수가 대표필자로서 10여 명의 연구팀을 이끌고 있으며, 지난 3년간 이미 연구가 진행되어 영문 초고가 나온 상태이다. 비록 연구의 진척은 가장 빠르지만 총서 전체의 구성상 영문 교과서가 나온 이후에 다른 주제들과 함께 간행될 예정이다.
네 번째 〈Development of Science and Technology under the Korean Authoritarian Regime〉은 권위주의 정치체제 아래서 단기간에 압축적 성장을 거둔 한국 과학기술의 성취를 규명하는 연구로, 한국과학문명사 연구소 문만용 교수가 대표필자로 연구하고 있다. 각 권의 대표필자들은 필요한 경우 국내외의 관련 학자들을 공동필자로 유치하여 연구를 함께 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이 연구들은 최소 3년 이상의 연구와 집필, 2년간의 심사와 에디팅 작업을 거쳐 빠르면 2018년경부터 출판될 예정이다.
계획중인 6권의 주제 내용
나머지 주제들에 대한 연구는 2016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지만 일부가 변경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 현재 계획된 주제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 산업기술의 발전과정을 밝혀 후발국에 산업기술 발전 모델로 제시하려는 〈Dynamics of Technological Development in Korean Industrialization〉, 환자, 의사, 국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인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의약 문화와 그 속에서 태동한 세계적인 수준의 의학적 성취를 규명하려는 〈Patients, Doctors, and the State: History of Korean Medical and Pharmaceutical Culture〉, 수학과 전통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한국인의 수와 수학에 대한 학문적 성취와 독자적인 수학 문명의 특성을 규명하는 〈Mathematics and the History of Korean Civilization〉,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과학과 만나 한국의 과학전통이 변용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The West and Korea in the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 등이다.
아울러 한국 과학문명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헌이나 자료에서 핵심 부분을 뽑아 번역과 함께 그것의 의미를 담아낼 〈Source Book for the Korean History of Science〉도 출간할 예정이다. 이 자료집은 원래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았지만 영문 에디터와 익명의 심사위원들이 그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추가되었다. 한국과학문명사 교과서와 함께 일차사료를 담은 영문 자료집이 간행된다면 해외의 연구자들이 한국 과학문명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것이다.
〈Science and Civilisation in Korea〉의 간행은 한국 전근대 과학문명에 대한 표준을 세움으로써 그동안 중국과 일본 중심의 편향되고 왜곡된 동아시아 과학 문명사의 이해를 바로 잡고, 근현대 한국 과학기술 성취의 메커니즘을 규명하여 후발국들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한국의 과학문명 사례와 수많은 후발국가들의 과학문명을 결합함으로써 서구 현대과학 문명론과 중국 전통과학 문명론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을 극복하는 제3의 글로벌 과학 문명 연구 모델을 모색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코에디터로 참여하고 있는 컬른 교수가 지난해 11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얘기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지정학적으로 미묘한 곳에 위치한 한국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은 군사력 등 힘에 의존한 하드웨어가 아니라 세계인들이 한국의 과학·문화·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한국이 평화로운 나라라는 것을 알리는 소프트웨어이다. 이번 총서 출간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구실을 할 것이다.”
글_문만용
한국과학기술원
한국과학문명사연구소 연구교수
mymoon@kaist.ac.k
글쓴이는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한국의 현대적 연구체제의 형성〉(선인, 2010), 〈한국 근대과학 형성과정 자료〉(서울대출판부, 2005) 등이 있다.
출처 : http://www.kofst.or.kr/kofst/PDF/2014/n2s537/GGDCBE_2014_n2s537_36.pdf